목적 없는 삶
2022년에 KAIST에서 연구년을 보내던 중에 제가 학부시절을 보낸 기계공학과의 뉴스레터를 통해 인터뷰를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몇가지 이야기를 했지만 그 중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2. 교수님의 학부 시절의 어떤 경험이 지금의 분야에서 일하시게 된 계기가 되었는지요?
학부 시절의 어떤 특정 경험이 계기가 되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여러 길을 돌고 돌아서 지금의 연구를 하게 되었는데요, 주로 어떤 시스템 전체 혹은 일부를 최적화 문제로 모델링하고 여러 가지 계산 방법을 동원해 문제를 푸는 일입니다. 학부 시절, 제가 기계공학과에서 가장 좋아했던 과목은 ‘시스템 동역학’과 ‘수치 해석’이었습니다. 좋은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즐겁게 공부했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어떤 강한 동기로 지금의 이 길에 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 제가 좋아하는 방향으로 조금씩 조금씩 움직여 온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제가 좋아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조금 더 일찍 깨닫게 되었더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짧은 인터뷰라서 제 생각을 자세히 쓰지는 못했던 터라 여기에서 제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좀 더 해보려고 합니다.
저는 살면서 인생의 장기적인 목적(Goal)을 갖고 뭔가를 해오지는 않았습니다.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선명하지 않은, 술에 술탄듯, 물에 물탄듯 하는 생활을 많이 했습니다. 학부시절에 친구들이 저보고 특별히 좋아하는게 뭔지 특별히 잘하는게 뭔지 모르겠다는 말을 한 기억도 있습니다. 저도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좋아하는 게 특별히 없는데, 좋아하는 걸 일부러 만들어내는 것도 어려웠고, 크게 목적이 없는 생활을 오래 했습니다. 대학원에 가면 그런게 생길까 했는데, 박사 학위를 받은 후에도 뭔가 내 연구에서 아주 장기적인 큰 미션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냥 그 때 그 때 재미있는 연구 하면서 지내왔습니다. 한 우물을 좁고 깊게 판다거나 하는 것도 아니고,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면서 연구 합니다. 이래도 되나 싶긴 한데, 그렇게 살아왔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2022년에 뉴스레터 인터뷰를 했을 때 즈음, “인생의 목적”을 바라보는 제 시각이 바뀌었습니다. 내 인생은 내가 계획하고 있는 미래에 의해서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아오며 지나다니는 길에 의해서 설명되는 것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학부 때 기계공학과에서 좋아했던 과목은 ‘시스템 동역학’과 ‘수치해석’인데, 시스템 동역학은 종류가 다른 컴포넌트들의 상호작용을 시스템 전체를 바라보며 공부하는 과목이었고, 수치해석은 미분, 적분 등을 계산하기 위한 이론을 배우는 과목이었습니다. 저는 원래 산업공학을 전공으로 선택하고 싶었지만, 어떤 이유로 인해 기계공학을 전공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돌고 돌아서 지금 제가 하는 게, 전체 시스템을 모델링 하고, 그 모델 해석에 필요한 계산을 하기 위한 알고리즘을 개발하는 일입니다. 전 제가 뭘 좋아하는지 잘 몰랐지만, 조금씩 조금씩 제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최근 학회에서 제가 멘토로 삼고 있는 한 교수님을 만나서 인생 이야기를 꽤 오랫동안 했습니다. 제가 최근에 KAIST로 옮긴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그 분도 그 분의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놀랍게도 이 분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분은 제 연구 분야에서는 굉장히 성공하신 분이십니다. 임팩트 있는 좋은 연구도 많이 하셨고, 학회 조직 및 저널 심사 등에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도 많이 하셨고 상도 많이 받으셨습니다. 누가봐도 성공한 학자입니다. 그런데 이 분도 뭘 좋아하는지 잘 모르는 삶을 살았고, 뭘 해야 할지 모르겠는 시간들을 보내고 있고, 앞으로는 뭘 하는 것이 좋을지 잘 모르겠다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심지어 학부 때는 처음에는 공학과 전혀 상관 없는 전공을 택했다가 그 분야에 재능이 없음을 깨닫고 지금의 공학 분야의 학부 전공으로 바꾸어 졸업하셨다고 합니다. 지금도 다음 단계로 나아기기 위해서는 선택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 다가오는 데, 어떤 걸 좋아하는지 어떤 걸 하고 싶은지, 어떤걸 하는게 좋을지 잘 모르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분의 말씀이 굉장히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이 분처럼 성공한 분도 저처럼 뭘 좋아하는지 잘 모르는 채로 연구 경력을 이어오고 계시다는 점에서 마음의 큰 위안을 얻었습니다. 대화 나누면서 닭살도 살짝 돋았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이 선명해서 먼 미래를 바라보며 인생의 목적을 세우고 그 목적에 다다르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면 참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내가 하는 일에 성공을 거둘 수 있고, 성취감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선명한 인생의 목적을 가진 사람들은 사실 굉장히 극소수라고 생각합니다. 여러가지 조건들이 맞아 떨어져서 선명한 선호도와 재능과 목적이 생긴 운 좋은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분들을 늘 부러워 하며, 또 신기해 하며 살았습니다. 제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경험, 그리고 제 멘토와의 대화를 통해, “선명한 목적이 없어도 괜찮지 않나?” 라는 생각을 합니다. 다만, 멀리 있는 목적지는 바라보지 못하더라도, 제 눈 앞에 떨어진 것에는 제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하며 살았습니다. 제 눈 앞에 보이는 것들 중에서는 그 중에 더 재미있는 것을 선택해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짧고 단순한 선택들이 모이고 모여서 긴 흐름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주 작은 습관의 힘(Atomic Habits)“의 첫번째 챕터에는 매일 매일 늘상 하는 사소한 일들을 조금씩 더 잘하려고 노력하는 운동 선수, 스포츠 팀이 결국은 큰 성장을 이루어 낸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가 이 글에서 하고자하는 말과 맥락은 좀 다르지만, 유사한 면이 있습니다. 나에게 장기적인 인생의 선명한 목적이 없다고 하더라도, 내가 매일 매일 하는 일들을 즐겁게 하려고 노력하고, 조금이라도 더 좋아하는 일을 선택하려고 하다보면, 결국은 그런 선택이 쌓여서, 내가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의 선명도가 조금씩 짙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 동안 정말 두서 없이 연구를 해왔지만, 한 20년 하고 나니까, 내 연구에 조금 더 선명함이 생겼고,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장기적인 목적은 설정하기 어렵더라도, 단기적인 목표들은 설정할 수 있었던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 단기적인 성취를 바탕으로 이런 그림을 그리고 조금 더 장기적인 목표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Ideal하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이것도 그냥 이대로 괜찮지 않나 생각합니다. 한 20년 더 하다보면 더 선명해져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안 그렇게 되면 또 어떨까 싶습니다. 뭐라도 즐겁게 하고 있겠죠.
아래에 기계공학과 뉴스레터 인터뷰 전문을 옮겨둡니다. 재미없는 아재개그를 견뎌주세요.
[2022년 5월 ME Newsletter] ME Alumni 관리자 2022.05.12 |
|
---|---|
2022년 5월 ME 뉴스레터에서는 University of South Florida 권창현 교수님을 모셨습니다. 1. 안녕하세요, 동문인터뷰로 모시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간략한 자기소개와 현재 선배님께서 하고 계시는 일에 대해서 설명해주세요. 안녕하세요 저는 미국 플로리다주 탬파에 있는 University of South Florida의 산업 및 경영공학과에서 부교수로 근무하고 있는 권창현이라고 합니다. KAIST 기계공학과에서 학사 학위를 2000년에 받은 뒤, 미국으로 유학하여 산업공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저는 교통, 물류 시스템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최적화 문제를 만들고 다양한 방법으로 계산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머신러닝, 강화학습 같은 학습 기반 방법으로 최적화 알고리즘의 성능을 향상하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지금은 마침 KAIST에서 안식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학창 시절 즐겨 먹던 ‘장터 보쌈’을 먹고 싶었는데, 없어졌다는 말을 듣고 슬퍼하고 있습니다. 맛있는 보쌈집 추천 부탁합니다. 2. 교수님의 학부 시절의 어떤 경험이 지금의 분야에서 일하시게 된 계기가 되었는지요? 학부 시절의 어떤 특정 경험이 계기가 되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여러 길을 돌고 돌아서 지금의 연구를 하게 되었는데요, 주로 어떤 시스템 전체 혹은 일부를 최적화 문제로 모델링하고 여러 가지 계산 방법을 동원해 문제를 푸는 일입니다. 학부 시절, 제가 기계공학과에서 가장 좋아했던 과목은 ‘시스템 동역학’과 ‘수치 해석’이었습니다. 좋은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즐겁게 공부했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어떤 강한 동기로 지금의 이 길에 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 제가 좋아하는 방향으로 조금씩 조금씩 움직여 온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제가 좋아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조금 더 일찍 깨닫게 되었더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3. 교수님께서는 ‘대학원생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이라는 책도 집필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어떠한 계기로 ‘대학원’에 대한 책을 집필하게 되신 건지 궁금합니다. 박사학위를 마치고 막 조교수가 되었을 때, 주변에서 아직 학위를 하고 있던 친구 들에게 고민을 들을 기회가 많았습니다. 졸업이 눈에 보이지 않고, 지도교수와의 갈등에서 오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토로할 곳이 없었을 때, 아마 조금 먼저 졸업했던 제게 고민을 털어놓는 것이 편했나 봅니다. 제가 인상과 달리 굉장히 대하기 편안한 사람입니다. 하. 하. 하. 아무튼, 그런 고민 상담을 하다 보니, 사람마다 상황은 달랐지만, 대체로 고민의 결이 비슷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다가 2011년에 생각을 정리해서 블로그에 ‘박사과정 학생이 유의해야 하는 점’이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습니다. 제가 쓸데없는 생각들을 쓰고 있던 “잡생각 전문 블로그”(https://thoughts.chkwon.net)라는 곳이었습니다. 그 글이 트위터, 페이스북 등에 꾸준히 공유되었고, 그 후에도 대학원생 생활과 연구에 대한 글을 몇 편 더 썼습니다. 그러던 중, 페이스북에서 역시 대학원생 생활에 대한 글을 쓰고 있던 최윤섭 님, 엄태웅 님을 알게 되었고, 함께 책을 쓰기로 의기투합했습니다. 책을 출간할 목적으로 팀 블로그 ( 4. 꾸준히 연구를 하는 일은 어려운 것 같습니다. 연구를 하시면서 힘드셨던 적은 없으신가요? 짧은 시간 동안 알찬 연구를 수행하실 수 있었던 비결과 원동력은 무엇이라 생각하시는지 알고 싶습니다. 알찬 연구를 수행한 것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꾸준히 하려고는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를 움직여온 원동력이라는 게 있다면, 세 가지 욕구가 그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는 생존의 욕구입니다. 내 연구가 잘 안 되고 못나 보여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다시 책상 앞에 앉게 한 것은 승진의 압박임을 숨길 수 없습니다. 지금은 테뉴어를 받아서 그런지 첫 번째 욕구는 꽤 많이 줄어든 상태입니다. 두 번째는 호기심을 해결하고 싶은 욕구입니다. 연구하다 보면 새로운 것들을 배우게 되고 깊이 들어가서 또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 내게 됩니다. 이 과정이 꽤 재미있습니다. 새로운 것을 배우면 배울수록 궁금한 것이 늘어나게 됩니다. 궁금한 것이 많아서 주변 사람들을 피곤하게 하기도 하지만, 연구를 꾸준히 하는데 호기심이 큰 원동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세 번째는 사회에 어떤 방식으로든 기여하고픈 욕구입니다. 제가 속한 여러 사회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은 욕구가 있는데, 연구하고 교육하는 교수가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가장 큰 방법은 결국 학생 지도를 열심히 하면서 좋은 연구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기를 저와 함께 하는 학생들에 대한 책임감이 제가 꾸준히 연구를 할 수 있게 하는 큰 원동력이 됩니다. 그 외에도 작게나마 제가 사회에 기여할 방법을 여러 방향으로 모색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욕구는 100% 순수한 것만은 아닙니다. 절반은 기여 그 자체에 대한 것이지만, 나머지 절반은 제 기여를 사회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구인 것 같습니다. 페이스북 따봉이나 깃헙 별 같은 것 포함해서요. 5. 다시 대학원생이 된다면 하고 싶은 것들, 후회하는 것들,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무엇인가요? 다시 대학원생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지만, 만일 그때로 돌아간다면 지도교수님과 좀 더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연구하고 논문 쓰는 이야기는 충분히 했다고 생각하지만, 지도교수님을 인간 대 인간으로 잘 알 기회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분도 살아오시면서 인생의 여러 단계에서 선택을 하셨을 텐데,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어떤 마음이셨는지 들어보고 싶습니다. 학생 때는 너무 어렵기만 했던 지도교수님인데, 돌아보니 어려워했던 건 그냥 저였던 것 같아서, 좀 더 편하게 대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 하면서 더 깊은 교류를 하지 못했던 것이 후회됩니다. 물론 실제로 다시 돌아간다면 지도교수님 그림자만 보여도 최대한 피해서 멀리 돌아다닐 것 같기는 합니다. 아, 스승의 그림자를 밟지 않는다는 말이 이런 뜻이었나요? |
Discover more from 잡생각 전문 블로그
Subscribe to get the latest posts sent to your ema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