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과 선택 이야기

일전에 산업공학 소개글을 썼던 적이 있습니다. 댓글 중에 학과 선택을 고민하는 고3 학생분이 계셔서 답을 하다가, 문득 제가 학과 선택을 했던 경험이 생각나서 한 번 글을 남겨봅니다.

저는 카이스트에서 대학 생활을 했습니다. 당시 대학으로는 드물게, 1학년 때 자유 전공으로 입학해서, 2학년으로 올라갈 즈음 원하는 학과를 아무런 제약 없이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운이 좋게도 정말로 가고 싶은 학과에 마음껏 지원할 수 있는 자유를 누렸습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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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모교가 화제입니다. 반갑네요 ㅎㅎ

 

별다른 생각과 고민 없이 고교 생활을 하고, 대학 1학년 수업을 들었던 저에게 학과 선택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우선 제가 가지 않을 학과부터 목록에서 지웠습니다. 고교시절부터 화학은 잘하지 못 했었기 때문에, 화학을 많이 공부 해야 하는 학과부터 지웠습니다. 화학과, 화학공학과, 생명공학과. (지금은 학과 이름이 많이 바뀐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산업디자인학과도 지웠습니다.

좋아하는 과목을 생각해봤습니다. 수학. 그러니까 저는 미적분학을 재미있어했습니다. 그렇다고 깊게 공부를 했던 것은 아니고, 그저 미분하고 적분하는게 재밌었습니다. 그래서 수학과에 가고 싶었습니다. 지금은 수학과가 아주 인기 좋은 학과 중 하나 지만, 당시에 수학과는 600명 정원 중에 5명에서 10명정도만 지원하는 그런 학과였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고교시절부터 올림피아드니 경시대회니 하는 곳에서 두각을 드러낸, 천재처럼 보이는 그런 학생들만 가는 곳이었습니다. 실제로 어떠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인상은 그러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 수학과 같은 순수학문을 공부 하면 밥 굶기 십상이라는 분위기가 팽배했던 시기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그 때는 그랬습니다.

다음으로 좋아했던 건, 역시 미적분학을 많이 썼던, 물리 과목이었습니다. 지금은 생각도 안 나지만, 미적분으로 물체의 운동을 묘사하고 여러가지 물리량을 구해내고 하는 것들이 굉장히 재미있었습니다. 그러나 역시 평범하기 그지 없었던 제 눈에는 물리학과도 수학과랑 분위기가 비슷했습니다.

겁을 먹고 또 눈을 돌렸던 곳은 전산학과입니다. 지금은 인기가 차고 넘치는 학과지만 제가 학과를 정하던 97년 당시만 하더라도, 컴퓨터 덕후들이나 천재 소년 소녀들이 가는 그런 학과였습니다. 학생마다 모두 개인 컴퓨터가 있던 시절도 아니었고, 노트북을 쓰는 학생은 한 학년에 10명 될까? 하던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게다가 1학년 때 들었던 컴퓨터 개론 실습시간에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UNIX 라는 것을 접했는데, 신세계였습니다. 저는 telnet 겨우 겨우 쓰고 학교 BBS에 접속해서 유머 글이나 읽고 했었지만, 학교의 컴퓨터 동아리 SPARCS에서는 온갖 별의 별 이상한 것을 만들어 내는 학생들이 많았습니다. 당시 카이스트와 포항공대 학생들 사이의 해킹 전쟁으로 수업용 서버가 마비되어서 실습을 하지 못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당시 어렸던 저한테 전산학과는 수학과나 물리학과나 마찬가지로, 분야에서 두각을 이미 드러낼 대로 다 드러낸 그런 천재들이나 (혹은 천재들처럼 보이는 학생들이) 가는 그런 학과였습니다. 미지의 세계였습니다. 그래서 지레 겁먹고 접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관심이 갔던 곳은 산업공학과였습니다. 당시부터 여러가지 잡다한 폭넓은 지식에 관심이 많았던 저는, 그런 적성의 학생들에게 잘 맞는 학과라는 말에 솔깃해서 산업공학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찬찬히 둘러보니 꽤 흥미로운 이야기였고, 산업경영학과와 더불어 산업공학과는 이공계열 학과만 있던 카이스트에서 그나마 공학 이외의 것들도 접할 수 있다고 알려진 학과였습니다. 여러가지 다양한 분야를 공부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었고, 지금은 그 이유가 잘 생각나지는 않지만, 굉장히 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산업공학과로 정했습니다.

부모님께 이 사실을 알려드렸습니다. 며칠 뒤, 선택을 다시 생각해보라는 아버지의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아버지 친구분께서 대기업에서 일하고 계신데, 그 분 말씀으로는 산업공학 전공 출신자들은 보통 입사를 하게 되면, 전공을 살릴 기회는 잘 얻지 못하고, 대부분 회사 전산실에서 근무하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조금 더 평범한(?) 학과로 갔으면 하는 마음이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 삼성전자가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아주 잘 나가고 있을 무렵이었기 때문에, 전자공학이 무난한 선택이 될 수 있다며 전자공학을 추천하셨습니다. 전자공학이 아니면, 공학계 전통의 인기학과 중 하나인 기계공학을 생각해보라고 하셨습니다.

생각하지 못한 반대 의견에 부딪힌 저는, 다시 학과 선택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선배들에게 미적분을 즐기는 저 같은 사람이 가면 좋을 학과에 대해 묻고 다녔습니다. 대답은 단연 기계공학과였습니다. 그래서 기계공학과로 정했습니다. 학과에서 배우는 과목들이 굉장히 즐거웠습니다. 미적분은 신나게 했네요. 재밌었습니다. 여러가지 역학 과목들을 굉장히 즐겁게 배웠습니다.

제가 현재 근무하고 있는 학과의 동료 교수님들께 제가 미적분을 좋아해서 기계공학으로 정했다고 하니 다들 좀 황당해 하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현재 근무하고 있는 대학에서도, 주로 2,3학년이 되면서 학과를 선택하게 됩니다. 학과에서 학부학생을 많이 유치 하기 위해서 학과 홍보도 하고 졸업생의 진로라던가 학과 발전 비전 같은 것을 소개하면서 학생을 유치하는 전략을 세우고 있었는데, 제가 미적분을 좋아해서 기계공학과에 갔다는 아주 단순한 이야기를 들려주니 황당해 하면서 허탈해 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아무튼, 저는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습니다.

기계공학을 전공했지만,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관심도 제법 있었습니다. 웹사이트 만드는 것에도 관심이 많았고, 그래서 당시로는 드물게 제 개인 홈페이지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뭘 아주 잘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컴퓨터 프로그래밍도 웹사이트 제작도 그저 한 번 해 봤다 정도였습니다. 어쨌든 졸업 후에는 웹사이트 개발하는 회사에 취직을 했습니다. 힘들었지만 재밌게 일 할 수 있었습니다.

회사 생활을 하다 보니, ‘인간’에 대해서 궁금해졌습니다. 대학원 진학을 위해 미국 유학을 준비 했습니다. 산업공학 중에서도 인간공학에 관심이 갔습니다. 그래서 인간공학을 공부할 작정으로 미국으로 건너 왔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첫 학기에 선형계획법(Linear Programming)이라는 최적화 수업을 듣게 되었고, 빠져들었습니다. 그래서 인간공학은 접고, 운용과학, 혹은 Operations Research (OR)이라고 불리는 공부를 하기로 했습니다.

제가 대학원 공부를 하면서 산업공학과에서 개설하는 교과목은 최대한 적게 들었습니다. 일부러 그랬던 건 아니지만, 관심이 가는 과목을 듣다 보니, 수학과 과목을 제법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사히 박사과정을 마치고 지금은 산업공학과에서 교통공학 문제를 풀고 있습니다.

글이 생각보다 길어졌습니다. 학과 선택으로 고민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제 경험을 한 번 공유해보고 싶었습니다.

학과를 정할 때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으로 정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만일 다시 그 때로 돌아가서 학과를 정하라면, 글쎄요. 어쩌면 기계공학을 또 다시 선택했을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수학이나 전산학 중 하나는 반드시 복수전공 혹은 부전공을 하고 싶습니다.

사실 속마음은 “대학 때 학과가 다 무슨 소용이냐, 그냥 크게 봐서 하고 싶은 공부 분야에서 아무 곳이나 마음에 드는 곳으로 가면 된다”라고 말하고 싶네요. 될 수 있으면 기초가 되는 학문을 전공하고 응용이 되는 학문은 부전공이나 복수전공으로. 그러니까 기계공학이냐 산업공학이냐를 가지고 고민하는 게 별로 안 중요해 보입니다. 대학 졸업 후에 전공을 살릴 수 있는 직장이 그 얼마나 되는지도 잘 모르겠고요. 진짜로 전공을 살려서 일을 하고 있는 분들이 얼마나 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대학 때 중요한 건 전공 지식을 습득하는 것보다, 지식을 습득하며 훈련을 하는 과정에서 ‘생각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이 무슨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냐”라는 말을 들을까 두렵기도 하고, 실제로 세상 물정 잘 모르기도 해서, 그냥 이 글은 제 개인적인 경험을 공유하는 선에서 마무리 하고 싶습니다. 조금 비겁한 마무리인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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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Responses

  1. 이은정 says:

    교수님 말씀에 깊이 동의합니다.. 전 비록 지금 전자과에 몸담고 있지만 수학을 부전공하지 못한게 못내 아쉽다는..ㅠㅠ 학부 당시에는 수학의 소중함을 몰랐으니까요..^^ 교수님이 말씀하신 ‘생각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학부 뿐만 아니라 석사든 박사든 공부하는 학교에 몸담고 있는 학생의 입장에서 가장 치열하게 배워야할 기본적이면서도 아주 중요한 자질이라 생각합니다 ^^

  2. Ruthless says:

    학과 고민하던 그 학생입니다ㅠㅠ 정말 감사합니다. 글 잘 읽었고요, 한가지 궁금한게 있는데
    산업공학을 다른 학문과 융합해서 그러니까 복수전공등으로 같이 배울 메리트가 뚜렷하게 있나요?
    있다면 어떤 면에서 좋을까요?!

    아 그리고 지금 마음은 거의 산공쪽으로 기운 것 같습니다^^ ㅎㅎ

    • 권창현 says:

      복수전공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지만 힘이 드는 길이기도 하지요. 전산, 수학, 통계를 잘 하는 사람은 어딜가나 환영받습니다.

  3. song says:

    글을 읽으면서 정말 많은 공감과 도움이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대학교 들어올 때 부터 컴퓨터만 바라본 학생입니다. 당시에는 가장 즐겁고 좋은 것이 였기때문에 컴퓨터공학과에 몸담았습니다. 하지만 전공이 심화로 들어가면서.. 포기해야하는 생각을 많이 했었습니다. 결국 휴학을하고 다른 길들을 많이 생각했습니다. 가장 즐겁고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하는게 와닿습니다.

    • 권창현 says:

      반갑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한다는 건 항상 어려운 일인 것 같네요. 직접 해 보지 않고 멀리서 바라보며 생각하던 것과 실제로 해 보고 느끼는 것이 전혀 다를 수도 있으니까요. 컴퓨터공학을 전공하기로 결정하셨을 때의 마음을 다시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컴퓨터의 어떤 점을 좋아했던 건지를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네요. 질문을 좀 쪼개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컴퓨터를 이용해서 뭔가를 하는 것을 좋아했던 건지, 아니면 실제로 컴퓨터 구조를 공부하거나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 좋았던 건지, 혹은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들 고 있는 내 모습이 좋았던 건지 ^^;; 등등 많이 있겠죠. 모든 공부는 심화로 들어가면 원래 어렵습니다. 안 어려우면 뭐 하러 대학까지 가서 비싼 등록금 내고 전공을 하겠습니까. 잘 생각해보시고 정말 하고 싶은 것을 하려면 컴퓨터 공학을 전공해야 한다면 그냥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천천히 꾸준히 하시길 바랍니다. ‘하고 싶은 것’이 뭔지 착각하고 있을 수도 있겠지만, 어렵다고 정말 하고 싶은 것을 포기하면 후회가 많이 남습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하고 싶은 것’과 ‘잘 하는 것’의 절충이긴 합니다. 지금은 어떤 결론을 내리셨는지 궁금하네요. 어떤 방향이든 결론을 내리셨으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그 길을 가세요. 생각이 많으면 골치만 아픕니다. 좀 단순해 질 필요도 있습니다 :)

      • 아직학부생 says:

        지나가던 학부생입니다. 지금은 마음을 먹었지만 제가 대학원에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시절에 수도 없이 떠올렸던 질문에 대해 답을 써주셨네요. 이 댓글 보기 전에 말씀하신 것처럼 결론이 나서 이 글을 보니 그런 마음이 더 강해지네요:) 좋은 글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4. gleek says:

    안녕하세요 지금 수험생활중인 고3 학생입니다!! 진로를 고민하다가 산업공학이라는 분야를 알게되서 시스템을 효율적으로 다루는 부뷴이나 마케팅쪽에 관심이 생겨 찾아보니 어느정도 비슷한 방향인거 같더라고요…하지만 이 글에도 써있듯이 산업공학과를 진학하면 전공을 잘 살리지 못하고 전산실에서만 일하는 경우가 많은건가요??

    그리고 경영학도 배워보고싶은 마음이있어 만약 산업공학과에 진학한다면 복수전공으로 경영학도 들어보고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또 제가 원하는 공뷰는 여러가지 주변상황들을 살펴보고 사람들의 심리나 다른 여러부분들을 분석해서 효율적인?시스템을 구축하고 아이디어를 내서 만들어내는 공부를 하고싶은데 산업공학과에서 배울 수 있는게 맞나요??

    공부하다 짬짬히 찾다 이글을 찾게되어서 횡설수설합니다 ㅠㅠ 또 궁굼한점도 굉장히 많네요ㅠㅠ!!

    • 권창현 says:

      1년…이 지나서 답글 답니다. 너무 늦었네요. 진로 잘 결정하셨길 바래요. 산업공학과 경영학은 복수전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을 것 같네요. 겹치는 부분이 꽤 많습니다. 복수전공은 서로 겹치는 부분이 많지 않은 학문을 하시는 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5. Printemps says:

    교수님 글잘읽었습니다 산업공학과에 대해알아보던중 유용한정보를 얻게되어 좋습니다. 여러분야로 뻐쳐나가는건 알겠지만 취업에 대한 궁금증이있습니다. 산업공학을 전공한후에 취업 가능한 전문직은 뭐가있나요??

  6. Yoonseok says:

    헉..! 교통공학 문제를 풀고 계셨다니요..!

  7. Lim michael says:

    안녕하세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제가 요즘 미국에 있는 산업공학 대학원에 진학을 준비중입니다. 여러가지 고민이 많은데요… 우선 대학교는 한국에서 다녔고 전공 또한 이공계이긴 하지만 산업공학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운좋게도 미국에 계시는 교수님으로부터 좋은 제안을 받았고 현재 고민중입니다. 제가 전공하게 될 분야는 설명을 들었을때 떠오르는 키워드로 before service와 의료산업에 사용되는 인체공학쪽이었습니다. 여기서 저의 고민은 미국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미국에서 3년 정도 경력을 쌓고 한국에 돌아왔을때 비전이 있는지 고민입니다. 최근 그 교수님의 분야가 bio쪽이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bio(의료기기)관련해서는 산업발전이 많이 이루어지지 않아 돌아왔을때 어려움을 겪지 않을까하는 고민이 있습니다. 관련 분야는 저의 적성에 맞다고 생각하여 기회를 놓치고 싶진않은데 혹시 bio관련 분야와 before service와 관련하여 한국에 돌아왔을때의 진로에 관하여 아시는 것이 있으시다면 조언을 구하고싶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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