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 위의 삶
오랜만에 블로그에 글을 쓰네요. 그 사이에 제 삶에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2023년 가을학기 부터 KAIST 산업및시스템공학과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KAIST로 옮기면서 페이스북에 쓴 글을 블로그에 기록해 둡니다.
경계 위의 삶
나는 한국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미국에서 살고 있는 이민자이다. 2003년에 처음 미국으로 유학 와서 20년을 살았다. 내 평생의 반 정도를 한국에서, 나머지 반 정도를 미국에서 산 셈이다. 처음에 미국으로 올 때는 이민이라는 의도를 가지고 온 것은 아니고 그저 공부하러 왔다. 어느새 시간이 지나면서 미국에서 직장을 가지고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을 키우면서 자연스럽게 이민자가 되었다. 나는 이민 온 적은 없지만 이민자가 되었다.
의도가 어찌 되었든 이민자의 삶은 ‘태어난 나라와 다른 곳에서 산다’는 표현처럼 간단하진 않다. 처음 10년 동안은 이민의 의미가 단순했지만, 그 뒤 10년 동안은 아이들이 크고 내가 더 나이가 들면서 복잡해졌다. 내 아이들이 한국계 미국인으로 겪게 될 정체성 혼란에 대해서 걱정했지만, 아이들은 유투브, 넷플릭스, 여행 등을 통해 한국 문화, 다양성 등에 대한 내용을 충분히 접하며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조심스레 잘 만들어 나가고 있는 것 같다.
정작 정체성 혼란을 겪는 건 나였다. 미국 TV는 가끔 스포츠 중계를 제외하곤 전혀 보고 있지 않다가, 첫째 아이가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미국 뉴스 정도는 같이 시청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고민에 미국 TV를 종종 보게 되었다. 미국 TV에서 나처럼 생긴 동양인을 보기는 굉장히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처음으로 정체성에 관한 질문을 하게 되었다.
성인이 되어 대부분의 시간을 미국에서 보냈는데, 여전히 한국 뉴스를 보면서 지내고, 한국 TV를 보면서 지낸다. 미국 뉴스, 미국 TV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보지 않는다. 대부분의 페이스북 친구들은 한국에 살고 있는 한국인이며, 내가 올리는 대부분의 포스팅은 한국어이다. 이런 게 잘못 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나는 대체 어디에 살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된다. 내 눈과 귀와 머리와 가슴은 항상 한국을 향해 있는데 내 몸은 미국에 있다.
이민자의 삶을 묘사하는 여러 표현 중 ‘경계 위의 삶’이라는 게 있다. 어느 쪽 테두리 안에도 들어가지 못하면서 그 경계 위에서 여러 혼돈 속에서 살아가는 이민자의 삶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나는 내가 테두리 같은 건 필요하지 않으며, 국적 같은 것도 의미 없으며, 지구 위 어디에 살든 그저 내가 거기서 내 역할 하면서 잘 살면 되는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내 마음 깊은 곳에 테두리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으며, 나는 어느 쪽 테두리 안에도 마음을 두지 못 한 채 살고 있다는 사실을 점점 깨달아 가고 있다.
내 경력이 늘어나고 내 삶이 안정되어 가면서 생긴 배부른 고민들이 있다. 좀 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싶고, 내가 좀 더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 그런 일들이 무엇인지 명확히 정의할 수는 없지만, 내 마음은 대체로 한국을 향해 있었다. 한국 대학에서 한국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지내면 좀 더 보람이 생길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친구들을 좀 더 자주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고, 부모님과 가까이 있어야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최근에 카이스트에서 1년간 연구년을 지내면서 이 욕구를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지만, 그 뒤로 미국으로 다시 돌아와서 계속 고민하게 되었다. 나는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
이민 온 적 없지만 이민자가 된 사람들이 주변에 아주 많다. 대학원 유학 와서 어쩌다보니 미국에 직장을 잡게 되어 가정을 꾸리게 된 사람들은 대체로 다 그럴 것이다. 그런 분들은 공통적으로 한국으로 돌아갈 고민은 매년 하지만, 결정을 내리지 못해, 그대로 계속 미국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큰 도시에 살았더라면, 한국인이 많이 있는 지역에 살았더라면, 한국 가는 직항이 있는 도시에 살았더라면, 이런 고민을 좀 덜 했을지 모르겠다. 최근에 비슷한 고민으로 한국 가신 분들을 보면 앞의 조건들이 충족되더라도 결국 비슷한 고민을 하게 되는 것 같다.
나도 이런 고민을 끊임없이 하고 있었고, 마찬가지로 매번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결정을 내리지 못하게하는 요소들이 많이 있는데, 많은 분들에게 그렇듯, 미국에서 (한국계) 미국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아이들이 점점 더 나이가 들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요소이다. 나도 마찬가지였고, 고민이 생길 때 마다, “때가 오면” 한국에 돌아가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지난 10여년 동안 결정을 미뤄왔다.
올 1월 고민은 좀 양상이 달랐다. 아내와 여러 대화를 하면서 그런 “때”는 오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달았고, 내 연구자 후반기 다음 20년을 미국에서 보내고 싶진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2008년에 교수가 처음 되었을 때 세웠던 커리어 초반의 목표들은 대체로 이뤘고, 그 이 후 동기부여를 잘 못 하고 있었다. 내가 이런 고민을 갖고 있는 것이 middle-age crisis인지, mid-career crisis인지, mid-immigration crisis인지 대체 뭐가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할 것이 분명해 보였다. 아마 결정을 내려도 후회할 것 같지만, 결정을 내리지 않아서 후회할 점들이 더 커보였다. 그래서 저질렀다.
2023년 가을학기 부터 카이스트 산업 및 시스템공학과에서 일하게 되었다.
카이스트에 원서를 내기로 결정한 것은 단지 위의 정체성 문제 뿐만은 아니다. 내 경력을 돌아봤을 때, 나는 내가 잘 나서 논문도 쓰고 연구비도 따고 하는 줄 알았는데, 중요한 연구의 전환점 마다 훌륭한 학생들이 있었다. 그래서 내 연구 커리어 후반부의 목표들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훌륭한 학생들을 최대한 많이 만날 수 있는 환경에 나를 밀어 넣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고, 나는 1년간 카이스트에서 연구년 보내면서 그 점에 대해서는 내 의견을 분명히 할 수 있었다. 실력 있고 열성적인 학생들과 연구에 대해서 대화하는 것은 아주 즐거웠고, 나에게도 자극이 많이 되었다. 그에 더불어 지적으로나 다른 사회 활동으로나 여러모로 큰 자극이 되는 동료교수님들의 존재 또한 나에게도 굉장히 중요한 요소였다. 내가 계획하고 있는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공동연구자들이 학내에 여기저기 많이 있다는 것도 기대가 많이 되는 부분이었다. 이런 모든 것들을 종합해 볼 때 내 커리어 중후반부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카이스트는 더할 나위 없는 환경을 제공해줄 것으로 생각이 되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저질렀고, 실제로 카이스트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어서, 나를 좋게 봐준 분들이 계셔서 매우 감사한 마음이다. 모국에서, 모교에서 훌륭한 분들과 함께 강의하고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어 굉장히 흥분되고 기대감이 충만하다.
나는 한국 이공계 공교육 시스템의 수혜를 아주 많이 받은 사람이다. 과학고등학교에서, 또 카이스트에서 당시 한국에서 받을 수 있는 교육으로는 최선의 교육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유학 갈 때도 당시 한국학술진흥재단에서 지원을 받을 수 있었고 지난번에 연구년 때도 한국연구재단에서 지원을 받았다. 나는 한국 사회로부터 받은 것들이 아주 많고, 이런 걸 어떤 형태로든 갚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카이스트에서 일한다는 것이 그걸 갚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한국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좀 더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사람마다 환경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르고 생각하는 방식이 다르고 선택도 다를 것이다. 나는 이 길을 선택했다. 기대와 걱정이 혼란스럽게 섞여 있지만, 앞으로 겪게될 다양한 새로움이 기다려진다.
44세. 두번째 이민.
축하드립니다. 예전에. 거의 십수년전에 수학과재학할때 latex 어떻게 작성하는지 검색해놨다가 간간히 재방문하던 사람입니다. 대전출신이라 카이스트가 한국에서 제일좋고 유성구 좋은것도 아는데 연구와 지도 및 삶에서도 좋은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덧: rss를 설정해뒀더니 게시글 포스팅후에 이메일이 왔네요
감사합니다. 대전은 살기 좋은 곳 같아요. 저한테도 제2의 고향 같은 곳이라 마음도 편안하고 좋습니다. 연구 열심히 하겠습니다! :)
한창 공부하던 시기에 교수님의 블로그를 보고 참 많은 도움과 고민의 방향을 잡던 것이 생각납니다. 우연히 학회장 근처 스타벅스에서 나란히 서게되어 처음 인사드렸던 기억도 엊그제 같은데 그게 7년전 일이었네요. 한국에서도 건승하시길 기원합니다. 가끔 TRB에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 때 말 걸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저도 그 때 상황이 잘 기억이 나네요. 벌써 오래전 일이 되었네요. 시간 참 잘 가네요 ^^ 네 학회에서 또 종종 뵙겠습니다.
안녕하세요 권창현 교수님,
저는 올해 여름 박사 학위를 받고 미국에서 원하던 직업을 구해 열심히 일하고 있는 Fresh Doctor입니다.
여러가지 좋은 글들 정말 감사합니다.
박사 나오기 전에도 블로그 글들을 읽었고, 덕분에 어찌저찌 만족스러운 박사생활을 한 것 같습니다.
제 지도교수님께서는 연구에 관련해서는 많은 도움을 주셨지만, 어떤 것이 좋은 연구인지 혹은 어떤 식으로 박사생활을 해야하는지에 대해서는 “모든것이 정답이다..” 같은 느낌으로 하시는 분이었어서 사실 박사과정 마인드셋에 대해서는 권창현 교수님께 많이 배웠습니다.
특히 내가 스스로 해야한다라는 마인드셋으로 박사생활을 하도록 이끌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좋은 연구를 스스로 제안하고 이끌어서 해볼 수 있었습니다.
다시 한번 너무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모든 일이 잘 풀리시길 미국에 남아 기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너무나 좋은 (그리고 재밌는) 글 감사합니다. 박사 과정 중에 처음 교수님 블로그를 발견한 뒤 종종 방문하고 있습니다. 저도 곧 교수님이 계셨던 플로리다의 한 주립대에서 첫 조교수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아마 저도 비슷한 고민을 계속 이어나갈 것 같습니다. 지원할 때 조차도 저의 선택이라기 보단 아내와 아이들의 선택으로 미국만 지원을 했기 때문에 아마 계속 고민을 하지 않을까 싶네요. 어떤 방식으로 흘러가든 교수님 블로그를 보면서 저도 기록을 좀 남겨야 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앞으로도 유익하고 재밌는 글 부탁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