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교수가 강의하는 방식
지난 가을학기 강의평가가 이제서야 나왔다. online으로 평가하는 것인데, 왜 이렇게 늦게 나온 것인지 궁금해서 학과장에게 물어보니, 공대의 모든 학과장이 승인을 해야 한단다. 무슨 이유로 승인 씩이나 필요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렇단다.
어쨌든, 지난 학기에 가르쳤던 과목을 학생들도 즐긴 것 같아 기분은 좋다. 학생들이 남긴 코멘트 중에, 에세이와 관련된 것은 두 개다. (지난 글 참조.)
- The final essay wraps things up well.
- I liked writing the final paper, although I was unsure what the professor really wanted in it.
아마 이 코멘트를 남긴 학생들은 좋은 에세이를 쓰지 않았을까 한다. 내가 에세이에 요구하는 것을 어느 정도 알려주긴 했으나, 내가 학생들에게 원한 것은 높은 수준의 자유도였기 때문에, 아마 준비하기에 어려운 점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즐겼다니 다행.
나는 수업할 때, 파워포인트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사진이나 어디서 스캔한 그림을 보여줄 때만 사용한다. 이것에 대해 한 학생이 코멘트를 남겼다.
- I liked how most of the notes were not pe-made powerpoint slides. Following the teachers writing helped me understand the information a lot better.
사실 내가 파워포인트를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준비하기 귀찮아서”. 처음에 1년 차 때 그냥 귀찮아서 손 노트를 준비했었고, 업데이트도 잘 안 했다. 파워포인트 준비는 정말 귀찮다. 근데 뭐 좋았다니, 감사.
슬라이드를 준비해 두면, 한 번 준비할 때 귀찮고 힘들어서 그렇지, 그 뒤로는 편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내 경험상으로는, 그냥 손 노트를 준비하면, 한 번 준비할 때도 귀찮지도 않고 힘들지도 않고, 그 뒤로도 귀찮지도 않고 힘들지도 않다. 내가 가르치는 대학원 과목은 파워포인트 사용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만, 학부 과목은 파워포인트 강의가 가능해 보이기도 하는데, 어쨌든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공부는 역시 손으로 써가면서 해야 제맛이지.
처음 강의를 시작한 1년 차 때는, 칠판에다가 판서했더니, 팔이 너무 아프더라. 계속 팔을 들고 있어야 하니, 죽을 맛이었다. 손에 분필 가루 묻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고. 2년 차 때부터는 실물화상기를 이용해서 종이에다가 썼는데, 꽤 편리했다. (1년 차 때는 모든 강의실에 설치되어 있던 실물화상기의 존재를 몰랐다!) 그러다가 언젠가부터 태블릿 PC에 전자펜으로 판서하고 있다. Lenovo ThinkPad X201 Tablet이라는 컴퓨터와 Windows Journal이라는 조금 오래 된 프로그램을 사용하고 있다.
여러 가지를 테스트해 보다가 적응하게 된 내 나름의 방식이다. 강의 노트는 이렇게 생겼다.
대학원 과목은 써야 할 양이 좀 많아서, 학생들에게 두 가지 옵션을 준다. 그냥 내 필기를 따라 써서 자기 노트를 만들던가, 아니면 수업시간에 내가 판서한 내용을 PDF로 올릴 테니, 그거 보던가.
내가 대학원생일 때, 수식 많고 필기량 많은 과목을 들을 때는 항상 딜레마가 있었다. 교수님 필기를 따라 쓰다 보면, 내가 배우는 것을 잘 이해할 수 있어서 좋았으나, 종종 필기하느라 급급해져서, 정작 교수님 설명을 잘 못 따라가는 경우가 있었다. 그렇다고 필기를 하지 않고, 교수님 설명만 듣다 보면, 내가 직접 손으로 써가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내 것으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냥 오디오 북 듣는 것 같다. (어떨 땐 심지어, 수업 중에 잠들기도 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두 가지 옵션을 줬다. 어떤 학생은 열심히 필기해가며 수업을 듣고, 어떤 학생은 내 설명에 열중하고 노트는 나중에 복습할 때 보더라.
아마 내가 그 날 강의할 내용의 요약본 같은 것은 나눠주고, 학생들은 수업을 따라 들으면서, 필요한 내용은 그 요약본 위에 추가로 필기하게 되면 조금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내가 그 날 실제로 필기한 노트는, 온라인으로 공유. 그런데 나는 게으른 교수라서, 요약본 같은 것을 만들지는 않는다. 요약본을 학생들이 가지고 있으면, 영화줄거리 보면서 영화 보는 것과 비슷하게, 강의 자체에 대한 몰입이 조금 떨어질 것 같기도 하다. “이런 문제가 있는데, 어렵지? 짜잔~ 이런 방법이 있지롱~” 하는 강의는 좀 어렵지 않을까.
학부생에게는 강의 노트를 공유하지 않는다. 강의 노트를 공유하면, 출석률이 급격하게 떨어진다.
내가 강의하는 방식이 모든 과목, 모든 교수, 모든 상황에 최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HCI 같은 분야나, 고고학 같은 분야에서는 시청각 자료의 활용이 조금 더 많이 필요할 테니 슬라이드를 더 활용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반대로, 슬라이드를 사용하는 수학과 교수님은 여태껏 단 한 분도 만나지 못했다. 실제로 어떤 수학과 교수님께 여쭤보니, 수학과에서는 무조건 판서/필기라고 하신다. 아마 내가 강의하는 방식은 공대생을 대상으로 한 과목 중 수학을 많이 사용하는 과목에서 사용하기에 적합한 혼합형 방식이 아닐까 한다.
비슷한 상황에 놓인 다른 교수님들께서는 어떤 식으로 강의하시는지 궁금하지만, 다른 교수님 수업에 섣불리 가보지는 못하고 있다. 아마, 서로 불편할 것 같다. 이 글을 보시는 분들 중, 강의하시는 분이 계시면, 좋은 강의 방법을 공유해주시면 좋을 것 같다. ‘좋은’ 방법이란, 귀찮지 않은 방법.
아직 대학생이라 그런지 여전히 청강과 필기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건 정말 풀리지 않는 문제같아요…
교수님 말씀에 집중하면 이해가 잘되지만 필기를 안하면 기억력이 안좋아서인지 많은 부분을 잊어버립니다. 한 부분을 진행하고 약간의 필기할 시간을 주시면 정말 좋을 것 같습니다
잘읽었습니다.
저는 학부생때 필기하는걸 좋아했고 상당히 중요시 여겼습니다. 공책은 한과목당 두개를 가지고 다녔어요. 하나는 이면지 묶음으로, 하나는 깔끔한 시중 노트. 이면지 공책은 수업시간에 사용합니다. 교수님 말씀중에는 교과서에 나오는 내용과 나오지 않는 내용이 있는데 이 둘을 구분해서 필기하려면 예습하면 됐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집에 돌아가서 예쁜 노트에 교과서 내용과 이면지 필기 내용등을 정리합니다. 연습문제도 모두 먼저 풀어보고 공책에 필기해놓습니다. 학기가 끝날때쯤이면 맨 뒷장까지 필기가 되어있지요. 이쯤되면 단원 순서쯤은 달달 튀어나옵니다..
이 공책중 몇개는 대학원생이 된 지금도 참고합니다.
필기와 함께 그 시절 추억, 분위기도 같이 느껴져서 필기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분야는 다르지만 공감되는 내용 잘 읽었습니다. 위와 같은 내용으로 고민하는게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위안이 되는군요. 저 강의때 역시 판서를 즐겨 사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