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도 먹고 술도 먹다 보면 논문도 쓴다

박사졸업하고 10년 조금 넘는 세월동안 논문을 이것저것 썼는데, 그 중에서 대단하지는 않지만 과정이 재미있었던 논문이 하나 있다. 별거 아닌 것 같아도 다시 보면 나혼자 나름 뿌듯해 할 수 있는 논문이다.

시작은 이 논문이다.

Bertsimas, D. and Sim, M., 2003. Robust discrete optimization and network flows. Mathematical programming, 98(1-3), pp.49-71.

2003년에 출판된 논문인데, OR 분야에서는 아주 드물게 1700회 이상의 인용수를 자랑하며 robust optimization이 크게 유행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논문이다. 박사과정 학생 시절 열심히 읽었던 논문이다.

2009년 여름에 한국 들어가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술마시다가 전북대학교 산업공학과의 이태한 교수님을 만나게 되었다. 이런저런 인연으로 연락을 주고 받다가, 이태한 교수님께서 2011년에 연구년을 버팔로로 오시게 되었다. 같이 밥먹고 술먹다가 이런 저런 이야기를 같이 하다가 robust optimization 분야에 둘 다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또 밥과 술이 쌓이더니 논문을 한 편 같이 썼다.

이태한 교수님이 이 논문 이야기도 해주셨다.

Park, K.C. and Lee, K.S., 2007. A note on robust combinatorial optimization problem. Management Science and Financial Engineering, 13(1), pp.115-119

Management Science and Financial Engineering(MSFE)은 한국경영과학회에서 발행하던 저널인데, 지금은 폐간되어 ‘한국경영과학회지'(Journal of the Korean Operations Research and Management Science Society)로 통합되었다. 심지어 저널의 이름도 위 논문이 출판될 때는 International Journal of Management Science였던 것 같은데, 그 이름으로는 검색도 잘 안 된다. 아무튼 이런 저런 사연에다가 미국에서 대학원 교육을 받은 나는 아무래도 잘 모를 수 밖에 없던 논문이었다. 위 논문의 제2저자이신 이경식 교수님은 현재 서울대학교 산업공학과에 계시는데, 이태한 교수님과는 박사과정을 같은 연구실에서 마쳤다. 그래서 이태한 교수님께서 위 논문을 알고 계셨던 것.

Bertsimas and Sim (2003) 논문에는 어떤 문제를 n+1 번 풀면 robust optimization 문제의 최적해를 구할 수 있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Park and Lee (2007)에서는 그 숫자를 n+1-\Gamma 번만 풀면 된다는 것을 보였다. 물론 \Gamma값에 따라 다르지만, 어쨌든 계산량이 조금 줄어든다. 작지만 재미있는 결과이다.

이태한 교수님께서 말씀하시길 자기가 그냥 계산하다 보니 계산을 한 번 더 줄일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하셨다. 그러니까 n-\Gamma. 이걸 어디다가 출판하기도 그렇고 해서 그냥 본인만 알고 계신다고 했다. 그러다가 이태한 교수님은 전북대학교로 돌아가셨고, 나는 여전히 버팔로에서 빙판길을 운전하며 살고 있었다.

2013년 어느날 Google Scholar가 다음 논문을 알려주었다. ‘Robust Optimization’을 알림 키워드로 설정해 두었기 때문이다.

Álvarez-Miranda, E., Ljubić, I. and Toth, P., 2013. A note on the Bertsimas & Sim algorithm for robust combinatorial optimization problems. 4OR, 11(4), pp.349-360.

4OR은 Quarterly Journal of Operations Research의 줄임말로, 벨기에, 프랑스, 이탈리아의 OR 학회가 연합해서 발간하는 저널이다. 그러니까 MSFE 마냥 local 오스카 저널이다. 이 논문에는 이런 저런 다른 결과들도 있지만, 주로 위에 말한 계산을 n+2-\Gamma번만 하면 된다는 내용이었다.

응? Park and Lee (2007) 보다 하나 더 많네? 심지어 Park and Lee (2007) 논문을 모르고 있다. 해외에서는 검색도 잘 안 되고, 구하기도 어려운 한국 학회에서 발행하는 저널이어서 그랬던 것 같다.

한국 학자가 한국 학회 저널에 발행한 논문의 결과가 무시당한 것 같은 마음도 들고 이태한 교수님의 n-\Gamma 아이디어를 논문으로 제출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태한 교수님의 아이디어를 토대로 내가 그것의 응용에 대한 내용을 덕지 덕지 더럽게 붙여서 같은 저널 4OR에 제출했다. 물론 Park and Lee (2007) 논문을 cite하였다.

결과는 Reject and resubmit. 심사평을 살펴 보니 대체로 논문 내용이 더럽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니까 하나의 아이디어로 잘 정리가 되지 않았다는 것. 사실 이태한 교수님의 아이디어에 내가 덕지 덕지 더럽게 붙인 내용은 필요 없는 부분이었다. 그렇다고 계산 한 번 줄이는 내용으로 논문을 마무리 하기에는 좀 부족해 보여서 고민이 많았다. 그래서 일단 버려두었다.

어느날 버팔로에서 자동차 엔진오일도 갈고 점검도 받기 위해서 자동차 딜러샵에 딸린 정비소를 방문하였다. 두어시간 딜러샵에서 공짜 커피도 마시고 쿠키도 먹으면서 밀린 일들을 처리하다가, 이 논문을 어찌해야 할까 ‘어쩌지 어쩌지’를 반복하면서 머리를 싸매고 있던 중, 새로운 발견을 하였다. 논문을 깔끔하게 쓰기 위해서 더러운 것들 정리 하다보니 \lceil \frac{n-\Gamma}{2} \rceil + 1 번으로 계산량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러니까 대략 계산량을 반으로 줄일 수 있다는 것.

덕지 덕지 붙였던 것 다 떼어내고 새로운 결과로 정리해서 다시 제출했고 논문은 출판되었다.

Lee, T. and Kwon, C., 2014. A short note on the robust combinatorial optimization problems with cardinality constrained uncertainty. 4OR, 12(4), pp.373-378.

이 내용들을 다 정리해보면 다음 표와 같다.

 

별 내용은 없지만 아무튼 개인적으로는 흥미로운 과정 끝에 발견한 것이라 이 논문에 애착이 조금 있다. 아마 수학이나 과학하시는 분들께는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일일 것 같다. 논문 내용을 바탕으로 Julia Package도 만들었다.

https://github.com/chkwon/RobustShortestPath.jl

역시, 큰 의미는 없는 소프트웨어다.

이 글을 쓰느라 Álvarez-Miranda et al. (2013) 논문을 다시 살펴보는데, 제2저자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Ivana Ljubić. 작년 INFORMS 학회에서 내가 조직했던 세션에 무턱대고 이메일 보내 초청 했던 분이다. Bilevel optimization 및 여러 discrete optimization 문제로 잘 알려진 분이시다. 재밌다. 이 바닥 아주 좁고 세상 돌고 도는 구나.

 

세줄요약

  • 밥도 먹고 술도 먹다 보면 논문도 쓴다.
  • 더러운 것은 청소하자.
  • 뭐라도 하다보면 될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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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Responses

  1. 권상일 says:

    뭐라 표현은 못하겠지만 많이 공감되많이 글입니다. 교수라는 직업을 잘 표현한것도 같고, 무엇보다 하시는 일에 큰 열정이 느껴지시는게 너무 좋습니다.

    항상 건승하세요, 교수님!

  2. S Lee says:

    지난 몇 년간 동안 박사공부를 시작하면서, 포닥을 하면서, 그리고 잡마켓에서, 마지막으로 먹기 살기 위해 연구와 교육을 병행하면서 교수님의 글을 읽으며 항상 마음 속 깊이 공감하다가 첫 댓글을 남깁니다. 감사합니다!

  3. Ji Soo Yi says:

    이 블로그에 글도 좀 써주세요.

    • 권창현 says:

      엇… ㅎㅎ 그러게요. 요즘은 잡생각은 별로 안 나고, ‘아재개그’만 자꾸 생각 나는게, 나이가 들었나 봅니다. 집안에만 계속 있어서 그런지, 일상 속에서 새로움이란 게 많이 없어져가네요.

  4. 구경민 says:

    안녕하세요 교수님! 전북대 산업공학과 학부 졸업생입니다! 제 학부 지도교수님이 이태한 교수님이셨는데 재밌는 일화 읽고갑니다ㅎㅎ 학부생들 사이에서 이태한 교수님이 젠틀하시고 머리가 좋으시기로 유명했는데 이런 설화가 있다니 재밌네요ㅎㅎ. 제가 졸업 막바지에 종합설계프로젝트 이태한 교수님께서 프로젝트 지도 해주셨는데 피드백을 너무 세세하게 해주셔서 아직도 생각나네요ㅎㅎ (날카롭게 해주신 것도 덤이구요ㅎㅎㅎ)
    지금은 다른학교 대학원 와서 논문 쓰고 있는데 글이 많이 공감됩니다. 연구실 박사님이 추천해준 주제로 쓰고 있는데 지금 덕지덕지 붙힌 느낌이라 나중에 디벨롭할 때 문제네요ㅠㅠ 저도 계속 고민하면 교수님처럼 재밌는 결과를 낼지 기대를 해봅니다ㅎㅎ.
    글 잘 읽었습니다 교수님!

  1. March 11, 2020

    […] 원문: 잡생각 전문 블로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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