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을 배우는 두가지 방법: 조합형, 완성형

 

만으로 네 살인 내 딸은 요즘 조금씩 한글을 배우고 있는 중인데 그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꽤나 흥미롭다. 어릴 때는 무조건 뛰어 노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뭔가를 특별히 목표를 세우고 가르치거나 하지는 않지만, 놀아줄 것이 없어서 심심할 때는 한글도 가르치고 숫자도 가르치기는 한다. 육개월 전 즈음, 딸이 만으로 네 살이 되기전 ‘가나다…파하’를 가르쳤었다. 처음에는 헷갈려 하더니 (특히 ‘ㅈ’과 ‘ㅊ’의 형태가 글꼴에 따라 달라지는 것) 지금은 아주 잘 읽고 쓸 줄 안다.

최근에 한 번은 종이에 자기가 글자라고 생각하는 것(예를 들어 ‘너’, ‘모’ 따위)을 무작위로 쓰더니, 나에게 어떻게 읽는 것이냐고 물어보는 것이다. 물론 그 중에는 글자가 아닌 것도 있었다. 그것이 신기하기도 했고, 이제 다른 글자들을 배울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하여 ‘거너더’ 등을 가르쳐보기로 했다. 처음이라 어쩔 수 없이 주입식 반복을 통해서 가르쳐야만 했던 처음의 ‘가나다…’와는 달리 이번에는 딸의 논리적 사고력에 기대를 걸어보기로 했다.

먼저 딸이 ‘너’ 글자를 썼을 때, ‘너’는 ‘나’와 비슷한 글자라고 알려주었다. 그랬더니, 딸이 하는 말:

딸: ‘너’는 작대기가 안으로 있어.

다른 점과 비슷한 점을 인지 하기에 충분한 나이가 되었다. 물론 이번이 ‘너’라는 글자를 처음으로 접하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혹은 한글 학교에 가서 글자들을 배우면서 한번쯤은 접해봤을 것이다. 아마 ‘나’를 가르쳐준 직후에 ‘너’를 가르쳐줬더라면, 작대기가 안으로 있다는 식으로 받아들이지는 못 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시간이 지나서 글자의 특징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저런 반응이 나왔을 거라고 생각한다.

딸이 ‘ㅏ’와 ‘ㅓ’의 차이를 이해한다는 것을 알았으니, 이제는 아빠가 물을 차례.

아빠: 그럼 ‘더’ 한 번 써봐.

딸: ‘더’는 어떻게 써?

아빠: ‘더’는 ‘다’랑 비슷해.

‘더’ 쓰기 성공. 그럼 이번에는 다른 글자.

아빠: ‘서’도 쓸 수 있어?

딸: ‘서’는 뭐랑 비슷해?

아빠: ‘사’랑 비슷해.

성공. 이번에는 아주 흥미로운 반응이 나온다.

아빠: ‘버’ 한 번 써볼까?

딸: ‘버’는 ‘바’랑 비슷해!

놀랍다! 몇 번의 ‘ㅏ’와 ‘ㅓ’ 비교 뒤에 이번에는 소리가 비슷한 것을 글자가 비슷하다는 점으로 연결시키는데 성공했다. 표음문자의 특징, 한글의 특징을 그대로 이해했다. 다른 글자들도 비슷하게 물어보았으나, 모두 성공적으로 소리를 글자로 연결시키지는 못 했으나, 대충 비슷한 글자로 연결시켰고, 반 정도는 정확하게 성공시켰다.

딸아이의 친한 친구 중, 한 아이는 딸보다 삼개월 정도 어리지만, 언어능력이 뛰어난 것인지, 말도 아주 잘 하고, 글자도 아주 잘 읽는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책 읽는 것을 아주 좋아하여, 어릴 적 부터 엄마가 하루에 책을 수십권을 읽어줘야만 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책 내용을 외우게 됨은 물론이요, 글자에도 일찍 관심을 가져서, 읽은 책에 나온 적이 있는 글자들은 (내 딸이 ‘가나다…’를 배우던) 육개월 전 즈음에 이미 다 읽을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글자 하나 하나를 통으로 다 익혀버린 것이다. 이제는 왠만한 책은 혼자서 읽을 수 있다. 정말 대단하다.

그 친구가 글자를 잘 익히게 된 것이 부럽기도 하여 책 읽어주기를 통해 글자를 통으로 가르쳐 보기도 하였으나, 내 딸에겐 이미 불가능 한 방법이었다. 육개월 전, ‘가나다…’를 가르쳐 주고 나서, 책을 읽어 주다가 ‘강’ 이라는 글자를 보면, 받침 ‘ㅇ’을 손가락으로 가리고, 무슨 글자인지 물어보곤 했던 것이다. 그 뒤로는 ‘말’ 이라는 글자를 보면, 딸 아이가 받침 ‘ㄹ’을 손가락으로 가리고 ‘마’라고 읽었다. 무의식 중에 한글은 초성, 중성, 종성을 조립해서 사용하는 글자라는 것을 인지 해 버린게 아닐까 한다. 이 상황에서 ‘산’ 이라는 글자를 통으로 가르칠 수는 없었다. 저 글자가 아무리 ‘산’이라고 말해 줘봐야, 딸 아이의 눈에는 ‘사’라는 글자에 (쓸데없는) 뭔가가 더 붙은 것으로 밖에는 안 보이는 것이다.

두 아이의 한글을 바라보는 방식이 완전히 다르다. 이걸 보고 머리 속에 언뜻 스친 것은, 컴퓨터에서 한글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두 가지 방식, 조합형 방식과 완성형 방식이었다. 자세한 원리는 잘 모르지만, 완성형 한글 방식은 글자 하나 하나 마다 미리 코드를 다 정해서 ‘완성’해 놓고 사용하는 방식이고, 조합형 한글 방식은 초성, 중성, 종성의 자음, 모음 별로 코드를 부여하여, 한글을 ‘조합’ 하여 사용하는 방식으로 알고 있다. 마치 딸 아이와 그 친구가 한글을 바라보는 방식이 다른 것과 흡사하다. 물론 컴퓨터에서 완성형 한글 표현 방식이 가지는 단점(미리 표현해 놓지 않은 글자는 표현할 수 없음)이 사람이 한글을 배우는 방식에서는 발생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결국엔 두 아이가 한글을 충분히 배웠을 때 도달하는 이해도는 같겠지만, 한글을 배우는 과정이 아이 마다 꽤나 다를 수 있음이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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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Responses

  1. 김탱 says:

    이거 너무 재미있게 읽었어요. 역시 만점 아빠 다운 관찰력과 교육철학(?)이 담겨 있네요. 근데…가나다라…하는 똘순이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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