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진짜 되면 너무 기쁠 것 같아요
2019년에 “대학원생 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책이 나온 지 벌써 7년이 지났다.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우리 저자들의 삶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나 역시 20여 년의 미국 생활을 뒤로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2023년 8월부터 KAIST 산업및시스템공학과에서 교수로 일하기 시작했다. 오믈렛(Omelet)이라는 귀여운 이름의 스타트업도 창업했다.
이 책은 처음 기대했던 것보다 널리 읽히고 있는 듯하다. KAIST 도서관에서 몇 년째 인기 대출 도서 1위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걸 보면 대학원 생활을 둘러싼 학생들의 궁금증과 고민이 그만큼 깊은 것 같다. 책이 나온 지 7년이 지났지만 연구는 여전히 어렵고, 어렵지만 즐겁다. 학생들이 그 즐거움을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은 더욱 어렵다.
KAIST에서 새롭게 연구실을 꾸리며 운 좋게도 열정적이고 재능 넘치는 학생들을 많이 만났다. 그러나 아무리 잘 준비된 학생이라도 본격적인 연구에 들어서면 “멘탈 붕괴”의 늪에 빠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중 한 학생과의 경험을 조심스럽게 소개하고자 한다.
2025년 3월, 석사 과정을 마치고 박사 과정에 진학한 학생 S와 연구 프로젝트 하나를 시작했다. 학생 S는 석사 과정에서 확률 기반 방법론을 익힌 바 있었다. 때마침 KAIST를 방문하고 있던 공동 연구자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확률 기반의 이론 연구를 해 볼 수 있는 좋은 주제를 찾을 수 있었다.
연구를 시작한 뒤 몇 달 동안 여러 방향을 탐색했다. 그러나 탐색하면 할수록 분명해지는 것은, 우리가 이 연구를 통해 무엇을 밝히고 싶은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떤 방법이 적합한지조차 제대로 모른다는 사실뿐이었다. 그때부터 관련 업계의 전문가를 만나 실제 데이터를 더욱 자세히 살펴보고 현장의 견해도 들어 보았다. 함께 연구하던 공동 연구자도 이 분야의 전문가에게 조언을 구해 우리에게 전해 주었다.
여름과 가을이 지나 12월이 되어서야 우리는 어떤 연구를 해야 할지 감을 잡고, 큰 틀의 방향을 정할 수 있었다. 그 방향은 2026년 9월 현재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다만 새로 정해진 방향은 처음 구상했던 확률 기반의 이론 연구와는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 연구는 조합적 최적화 알고리즘을 개발하는 계산 연구로 바뀌었다.
조합적 최적화 알고리즘 개발은 내가 지난 수년간 해 온 익숙한 분야였다. 이제 방향도 정했으니 잘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계획을 세웠고, 그대로 실행만 하면 될 줄 알았다.
해가 바뀌어 2026년이 되었다. 1월에는 수많은 아이디어를 시도했다. 잘 안 됐다. 계획대로 안 됐다. 2월에도 역시 수많은 아이디어를 시도했다. 잘 안 됐다. 3월에도 여전히 잘 안 됐다.
3개월 동안 학생 S는 많은 시간을 컴퓨터 앞에서 보내며 코딩과 실험을 반복했다. LLM Agent 덕분에 코딩과 실험 자체는 빨라졌지만, 기대한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도 그만큼 더 빨리 확인하게 되었다. 그럴수록 마음은 더욱 조급해졌고, 학생 S는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연구에 점점 지쳐 갔다.
3월 말 어느 날, 학생이 연구실 슬랙으로 메시지를 보내 왔다.
“교수님, 혹시 다음 주에 시간 괜찮으시면 저녁 식사를 함께해 주실 수 있나요?”
식은땀이 흘렀다. 박사과정 학생이 먼저 저녁 식사를 청해 오는 일은 흔하지 않고, 뭔가 중요하게 할 말이 있다는 신호였다. 지쳐서 박사 과정을 그만두려고 하는 건가? 다른 연구실로 가고 싶어 하는 건가? 왜 그러는 거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약속한 날이 올 때까지 내내 마음을 졸였다. 그리고 당일 저녁, 긴장을 안고 식사 자리에 나갔다. 학생 S는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지금 연구가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이런 형태의 연구는 제가 하고 싶었던 연구도 아니고, 제가 잘할 수 있는 연구도 아닌 것 같아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스트레스가 심해요.”
학생이 방향을 잃은 채 좀처럼 진도가 나지 않는 연구 앞에서 당혹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1년 동안 연구랍시고 한 거라곤 문제를 겨우 정의한 것뿐이었다. 그것도 제대로 정의했는지, 해결 가능한지조차 확신할 수 없는 문제를 말이다.
학생의 말을 곰곰이 들었다. 나 역시 어떤 선택이 옳은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바로 연구를 접기에는 아직 확인해 보고 싶은 가능성이 남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렇게 제안했다.
“그러면 딱 한 달만 더 해 봅시다. 한 달만 더 해 보고 진전이 없으면, S씨가 더 잘할 수 있는 분야에서 다른 연구 주제를 찾아봅시다.”
그 한 달이 채 지나기 전인 4월, 학생에게서 이런 메시지가 왔다.
“교수님, 성능이 많이 괜찮아졌어요.”
5월에는 알고리즘의 성능이 좀 더 좋아졌다. 어느 날 학생이 기쁜 소식을 보낸 듯해 슬랙을 열어 보니, 메시지는 이미 지워져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학생이 답했다.
“괜찮은 결과가 나오면 공유드릴게요. 아까 너무 설레발이라 조용히 지웠어요.”
나는 웃으며 답했다.
“설레발 떠는 재미에 연구하는 거죠! 설레발-좌절의 무한 루프입니다.”
“근데 진짜 되면 너무 기쁠 것 같아요.”
“되면 파티해야 합니다.”
6월 8일, 드디어 기다리던 메시지가 도착했다.
“됐어요!”
우리가 만들던 새로운 알고리즘으로 그동안 풀리지 않던 문제를 마침내 풀어낸 것이었다. 바로 다음 날 학생 S를 내 연구실에서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고, 나는 이렇게 말했다.
“축하해요! 연구 재밌죠?”
그날 학생 S의 환한 얼굴이 아직도 또렷하다. 기쁨에 겨운 표정 뒤로 지난 시간의 피로와 앞으로 남아 있는 불확실성에 대한 걱정도 조금은 비치는 듯했다. 그 장면은 2026년 상반기, 교육자로서 가장 기뻤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학생 S에게 연구의 불확실성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 불확실성을 견디며 앞으로 나아갈 힘은 조금 얻은 듯했다.
물론 위기는 그 뒤에도 여러 번 찾아왔다. 7월에도, 8월에도, 심지어 이 글을 쓰기 이틀 전에도 지금까지 진행해 온 연구를 모두 엎고 방향을 다시 바꿔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했다. 다행히 그때마다 오류를 하나씩 고치고 필요하면 연구 방향도 조금씩 수정하면서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이 일련의 과정은 공부하는 것과 연구하는 것 사이에 하늘과 땅만큼이나 큰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했다. 공부할 때 푸는 문제에는 대부분 해답이 존재한다.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면 해답이 없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직 그 해답을 찾지 못했을 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연구는 다르다. 해답이 있는지 없는지부터 불분명하고, 내가 붙들고 있는 문제가 제대로 정의된 문제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다. 많은 학생이 이 과정에서 지치고 혼란스러워한다.
완성된 논문만 보고 있으면 연구도 문제 정의, 문제 해결 방법론 제시, 실험 계획, 결과, 결론의 순서로 차근차근 진행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논문이 보여 주는 순서와 연구가 실제로 진행되는 순서는 전혀 다르다. 실제 연구에서는 가설과 모델, 방법론과 실험을 끊임없이 수정하고 되풀이한다. 연구가 끝날 무렵에야 내가 어떤 연구를 했는지, 내가 한 연구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게 된다.
이 책에서 소개했던 아인슈타인의 말을 다시 한 번 옮긴다.
“우리도 우리가 뭐 하는지 잘 모르잖아요. 알면 연구가 아니잖아요. 그렇잖아요.”
그리고 이 모든 불확실성을 견디게 해주는 학생 S의 말도 떠올린다.
“근데 진짜 되면 너무 기쁠 것 같아요.”
그 말대로, 정말 기쁘다. 학생 S가 느꼈던 그 기쁨을 다른 많은 대학원생도 함께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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